중세 시대의 무절제한 알레고리적 해석에 질린 종교개혁자들은 알레고리적 해석을 잘못된 성경해석 방법으로 여기고 버린다.
그런데 알레고리적 해석에 질린 나머지 성경 속에 나오는 ‘알레고리 장르’까지 구분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는 사람들이 있다.
알레고리 장르(풍유 장르)와 알레고리적 해석(풍유적 해석)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앞의 것은 문학 장르에 속한 것이고, 후자는 성경해석 방법에 속한 것이다.
알레고리(장르)는 저자에 의해서 숨겨진 의미가 전달되도록 의도된 이야기이다. 알레고리 장르 해석의 열쇠는 저자가 의도한 의미를 올바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는 정당한 성경해석 방법이다.
반면에 알레고리적 해석은 원래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의미를 이야기에 억지로 집어넣어서 해석하는 것이다. 이는 정당하지 못한 잘못된 성경해석 방법이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알레고리 장르들은 잠언 5:15-18, 시편 80:8-15, 전도서 12:3-7, 에베소서 6:11-17 등이다. 잠언의 실례를 보자.
“(15)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16)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17) 그 물이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과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18)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잠 5:15-18).
이는 성경의 대표적인 알레고리 장르에 속한다. Bruce Waltke 교수의 해석에 의하면 여기 나오는 ‘샘’은 아내를 가리킨다. ‘물을 마시라’는 것은 성적인 갈증을 해소하라는 뜻이다. 이 본문의 의도는 분명하다. 음녀와 성관계 갖는 것을 경고하고 자기 아내와 성관계를 즐기라는 내용을 알레고리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저자의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난 경우에 알레고리 장르에 해당된다. 이는 정당한 성경해석 방법이다.
그런데 알레고리적 해석에는 이런 저자의 의도를 발견할 수 없다. 이는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해석이다.
대표적인 알레고리적 해석의 실례를 들자면 어거스틴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해석을 들 수 있다.
강도 만난 자는 아담으로, 예루살렘은 하늘의 도성으로, 여리고를 달(도덕성의 상징)로, 강도들을 마귀와 그에 속한 천사들로 본다. 그리고 마귀와 그에 속한 천사들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고 그래서 영적으로 반쯤 죽게 함으로써 그에게서 불멸성을 빼앗아 버린 것으로 이해한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구약성경을, 사마리아인은 그리스도를, 짐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심으로써 입은 육체를, 여관은 교회를, 여관집 주인은 사도 바울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이런 알레고리적 해석은 저자가 의도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 없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는 누가 우리의 진정한 이웃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어려움에 처한 자를 돕는 자가 진정한 이웃임을 가르친다.
강도 만난 자와 아담을 연결한 것, 여리고를 달과 연결시킨 것, 제사장과 레위인을 구약성경과 연결시킨 것, 사마리아인을 그리스도와 연결시킨 것, 짐승을 예수님의 육신과 연결시키는 것, 여관을 교회와 연결시킨 것, 여관집 주인을 바울과 연결시킨 것 등은 전혀 저자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의미를 억지로 본문에 집어넣어 해석하는 것을 알레고리적 해석이라고 한다. 그래서 알리고리적 해석(풍유적 해석)은 해석학적 정당성을 지지 받지 못한다.